궁궐로 떠나는 힐링여행 : 덕수궁 - 이향우 글.그림, 나각순 감수/인문산책 |
덕수궁 돌담길 따라 근대 역사의 이야기가 흐른다!
이 책은 ‘궁궐로 떠나는 힐링여행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에 이어 조선의 마지막 궁궐 ‘덕수궁’ 이야기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2009년부터 시작되어 최근 복원의 과정을 마친 석조전이 ‘대한제국 역사관’으로 문을 연 시점에 출간되어 독자들에게 덕수궁과 근대사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이끌어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조선 말 일제에 강제 병합된 대한제국의 아픈 역사와 함께하는 덕수궁 이야기를 통해 대한제국의 역사적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폄하, 왜곡된 가치를 회복하기 위한 출발점인 셈이다.
대한제국 시기 경운궁 영역은 현 서울시청 앞 광장의 일부뿐 아니라 미국 대사관저가 있는 정동 일대까지 영역이 꽤 넓었다. 하지만 1904년 경운궁 화재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파괴로 인해 궁의 면모를 잃었을 뿐 아니라 산업화에 의한 도로 확장으로 현재의 규모로 축소되었다.
서울 지하철 1호선과 2호선 시청역에서 내리면 덕수궁으로 연결이 된다. 덕수궁을 방문하고자 하는 누구라도 이러한 방법으로 덕수궁을 찾을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덕수궁으로 들어가기 전에 시청 앞 광장으로 건너가서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을 바라보자고 제안한다. 저자의 발걸음은 서울시청 앞 광장 중심에서 시작하여 조선호텔에 위치한 환구단 터를 둘러보고는 덕수궁 내부와 정동길을 따라 종횡무진한다. 독자들은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정동길 어디에서나 대한제국의 슬픈 역사를 만나게 될 것이고, 그 역사는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 역사와 연결되어 흐르고 있음을 확인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덕수궁 여행을 통해 대한제국의 역사를 되돌아보게 한다.
1. 정릉동 행궁에서 경운궁으로, 그리고 덕수궁까지
덕수궁은 조선왕조의 마지막 궁궐로, 정릉동 행궁으로까지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대한문을 지나 중화문을 통해 중화전 영역에 들어서면 그 뒤편에 단청을 하지 않은 2층 집이 웅장하게 서 있다. 덕수궁의 뿌리가 되는 ‘석어당’이라는 건물이다. 원래 조선왕조 제9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사저가 있던 이곳을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환도 후에 머물게 되면서 행궁이 되었다. 이곳에서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광해군은 1611년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정릉동 행궁으로 부르던 이곳을 ‘경운궁’이라고 정식 궁궐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후 조선의 왕들은 경복궁과 창덕궁을 정궁으로 사용했고, 경운궁은 별궁으로 남았다.
경운궁이 근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은 1895년 경복궁 건청궁에서 고종의 왕후 민씨가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세자를 데리고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하게 되었고, 곧바로 경운궁을 수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시 정동 일대에는 러시아,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등 각국 외교사절의 공관이 있었고, 선교사들이 많이 모여 살던 외국인 거주지였다. 고종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가장 적절한 정치적 선택을 한 것이었다. 이후 덕수궁은 대한제국의 영광과 애환을 고스란히 간직한 궁궐이 되었다.
2. 환구단에서 시작하여 정동길을 따라 걷는 덕수궁 여행
1897년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한 후 ‘환구단’을 지었다. 중국 사신을 위한 숙소나 연회장으로 사용되던 남별궁 자리에 환구단을 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낸 후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로 새로 정하고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리고 중국 황제가 내린 국새를 버리고 대한제국과 황제를 상징하는 대한국새를 제작했다. 이후 민족자존의 상징이 되었던 환구단은 일제강점기인 1913년에 헐려 그 자리에 총독부 철도호텔(지금의 웨스틴 조선호텔)이 들어섰고, 현재는 조선호텔 뒤쪽으로 삼문과 황궁우만이 남아 있다.
대한문을 들어서서 덕수궁 내부로 들어오면 다른 궁궐과는 다른 건축물이 눈에 띈다. 하나는 동서양 양식이 적절히 혼합된 ‘정관헌’이고, 다른 하나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서양식 석조 건축물 ‘석조전’이다. 고종은 정관헌에서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감상하며 외교 사절을 만나곤 했는데, 이곳에서 고종에 대한 커피 독살 미수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근대 국가로의 지향을 상징하던 석조전은 1900년에 짓기 시작해서 1910년 완공되었으나 그 해 국권을 빼앗겨 대한제국의 정전으로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채 그 의미가 훼손되었다.
19세기 후반 정동 주변은 외교의 중심지답게 각국 공사관이 밀집되어 있었다. 영국 공사관, 미국 공사관, 러시아 공사관과 대한성공회 대성당, 정동교회,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 19세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정동극장 옆 작은 골목길에 들어선 중명전은 의미 깊은 역사적 장소다. 경운궁 안에 지어진 황실 도서관이었는데, 1904년 경운궁 화재 이후 고종 황제가 중명전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근대사의 주요 무대가 되었다. 이곳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되었고, 고종은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중명전에서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헤이그 특사로 친견하고 친서를 전한 곳이다. 중명전 전시장에서는 을사늑약으로 인해 위기에 임박했던 대한제국의 상황을 살펴볼 수 있다. 근대 역사가 아직도 흐르고 있는 덕수궁 돌담길과 정동길로의 여행을 추천한다.
이 책은 ‘궁궐로 떠나는 힐링여행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에 이어 조선의 마지막 궁궐 ‘덕수궁’ 이야기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2009년부터 시작되어 최근 복원의 과정을 마친 석조전이 ‘대한제국 역사관’으로 문을 연 시점에 출간되어 독자들에게 덕수궁과 근대사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이끌어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조선 말 일제에 강제 병합된 대한제국의 아픈 역사와 함께하는 덕수궁 이야기를 통해 대한제국의 역사적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폄하, 왜곡된 가치를 회복하기 위한 출발점인 셈이다.
대한제국 시기 경운궁 영역은 현 서울시청 앞 광장의 일부뿐 아니라 미국 대사관저가 있는 정동 일대까지 영역이 꽤 넓었다. 하지만 1904년 경운궁 화재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파괴로 인해 궁의 면모를 잃었을 뿐 아니라 산업화에 의한 도로 확장으로 현재의 규모로 축소되었다.
서울 지하철 1호선과 2호선 시청역에서 내리면 덕수궁으로 연결이 된다. 덕수궁을 방문하고자 하는 누구라도 이러한 방법으로 덕수궁을 찾을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덕수궁으로 들어가기 전에 시청 앞 광장으로 건너가서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을 바라보자고 제안한다. 저자의 발걸음은 서울시청 앞 광장 중심에서 시작하여 조선호텔에 위치한 환구단 터를 둘러보고는 덕수궁 내부와 정동길을 따라 종횡무진한다. 독자들은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정동길 어디에서나 대한제국의 슬픈 역사를 만나게 될 것이고, 그 역사는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 역사와 연결되어 흐르고 있음을 확인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덕수궁 여행을 통해 대한제국의 역사를 되돌아보게 한다.
1. 정릉동 행궁에서 경운궁으로, 그리고 덕수궁까지
덕수궁은 조선왕조의 마지막 궁궐로, 정릉동 행궁으로까지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대한문을 지나 중화문을 통해 중화전 영역에 들어서면 그 뒤편에 단청을 하지 않은 2층 집이 웅장하게 서 있다. 덕수궁의 뿌리가 되는 ‘석어당’이라는 건물이다. 원래 조선왕조 제9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사저가 있던 이곳을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환도 후에 머물게 되면서 행궁이 되었다. 이곳에서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광해군은 1611년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정릉동 행궁으로 부르던 이곳을 ‘경운궁’이라고 정식 궁궐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후 조선의 왕들은 경복궁과 창덕궁을 정궁으로 사용했고, 경운궁은 별궁으로 남았다.
경운궁이 근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은 1895년 경복궁 건청궁에서 고종의 왕후 민씨가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세자를 데리고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하게 되었고, 곧바로 경운궁을 수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시 정동 일대에는 러시아,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등 각국 외교사절의 공관이 있었고, 선교사들이 많이 모여 살던 외국인 거주지였다. 고종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가장 적절한 정치적 선택을 한 것이었다. 이후 덕수궁은 대한제국의 영광과 애환을 고스란히 간직한 궁궐이 되었다.
2. 환구단에서 시작하여 정동길을 따라 걷는 덕수궁 여행
1897년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한 후 ‘환구단’을 지었다. 중국 사신을 위한 숙소나 연회장으로 사용되던 남별궁 자리에 환구단을 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낸 후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로 새로 정하고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리고 중국 황제가 내린 국새를 버리고 대한제국과 황제를 상징하는 대한국새를 제작했다. 이후 민족자존의 상징이 되었던 환구단은 일제강점기인 1913년에 헐려 그 자리에 총독부 철도호텔(지금의 웨스틴 조선호텔)이 들어섰고, 현재는 조선호텔 뒤쪽으로 삼문과 황궁우만이 남아 있다.
대한문을 들어서서 덕수궁 내부로 들어오면 다른 궁궐과는 다른 건축물이 눈에 띈다. 하나는 동서양 양식이 적절히 혼합된 ‘정관헌’이고, 다른 하나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서양식 석조 건축물 ‘석조전’이다. 고종은 정관헌에서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감상하며 외교 사절을 만나곤 했는데, 이곳에서 고종에 대한 커피 독살 미수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근대 국가로의 지향을 상징하던 석조전은 1900년에 짓기 시작해서 1910년 완공되었으나 그 해 국권을 빼앗겨 대한제국의 정전으로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채 그 의미가 훼손되었다.
19세기 후반 정동 주변은 외교의 중심지답게 각국 공사관이 밀집되어 있었다. 영국 공사관, 미국 공사관, 러시아 공사관과 대한성공회 대성당, 정동교회,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 19세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정동극장 옆 작은 골목길에 들어선 중명전은 의미 깊은 역사적 장소다. 경운궁 안에 지어진 황실 도서관이었는데, 1904년 경운궁 화재 이후 고종 황제가 중명전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근대사의 주요 무대가 되었다. 이곳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되었고, 고종은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중명전에서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헤이그 특사로 친견하고 친서를 전한 곳이다. 중명전 전시장에서는 을사늑약으로 인해 위기에 임박했던 대한제국의 상황을 살펴볼 수 있다. 근대 역사가 아직도 흐르고 있는 덕수궁 돌담길과 정동길로의 여행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