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팔로 하는 포옹 - 김중혁 지음/문학동네 |
“다가올 시간을 가늠해보는 일, 그게 사랑의 시작일 것이다.”
김중혁 네번째 단편소설집, 첫번째 연애소설집
소설가 가운데 이이만큼 ‘잡(雜)’한 자 또 있을까. 좋은 걸 좋게 볼 줄 아는 타고난 심미안의 소유자니 그간의 삶이 꽤나 피곤했을 거라 짐작도 해보거니와 동시에 그가 전력에 도통 바닥이란 게 나지 않는 무한한 호기심의 별에서 왔을 거란 확신도 해본다. 그렇다고 뭐, 그가 ‘어른’ ‘왕자’란 얘기는 아니다. 어쩌면 “평범하고 작고 눈길 가지 않는” 이 시대 평범한 남자들의 대부가 또한 이이가 아닐까 해서다. 서두가 길었다. 우리 시대의 또 한 명의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인 김중혁 작가의 얘기다. 그리고 그의 신작 소설집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을 막 꺼내든 참이다. 숫자로 치자면 네번째 소설집이고, 그의 입을 빌리자면 첫번째 연애소설집이다. 대놓고 연애라니, 그렇다면 주요한 테마를 ‘사랑’으로 잡았다는 얘기인데 세상 그 어떤 소설이 사람에 대한 사랑이 아니고서 쓰일 수 있겠냐마는 그럼에도 ‘김중혁이 이야기하는 남과 여’는 보다 특별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왜? 서두에 밝혔듯이 그는 ‘잡(雜)’한 남자니까. 잡종은 원래 변종과 별종을 낳는 법이니까.
2000년 『문학과사회』로 데뷔했으니 올해로 등단 15년을 맞은 그다. 김중혁은 사계절마다 형형색색으로 피었다 지는 다양한 꽃 보기를 즐겨하는 수목원의 산책자를 닮았다. 그간 그가 펴낸 소설집 『펭귄뉴스』 『악기들의 도서관』 『일층, 지하 일층』, 장편소설 『좀비들』 『미스터 모노레일』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그리고 독특한 기획으로 펴낸 여러 산문집들과 동료와의 협업 글쓰기의 결과물들을 가만 보고 있자면 그 재주의 넓이와 깊이가 마구잡이로 늘었다가 줄어드는 흡사 검은 고무줄 같다 싶은 생각도 해보게 된다. 힘껏 당겨 한껏 늘이고 싶으면 그렇게 하고, 또 심드렁해져서 가만 내버려두고 싶으면 그렇게 해서 원래의 사이즈로 돌아오게 만드는 고무줄. 일례로 김중혁의 산문집 제목들을 한번 보자. 『뭐라도 되겠지―호기심과 편애로 만드는 특별한 세상』 『메이드 인 공장―소설가 김중혁의 입체적인 공장 산책기』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빨간책방에서 함께 읽고 나눈 이야기』 『대책 없이 해피엔딩―김연수 김중혁 대꾸 에세이』 그리고 『모든 게 노래』까지 그 제목들에서 느껴지는 자유분방함은 그를 그답게 보이는 데 제 역할을 다할 뿐 아니라 몹시 부러운 작가다 싶은 질투마저 유발하기에 충분하다. 왜? 제멋대로 보고, 제멋대로 쓰고, 제멋대로 그리고, 제멋대로 담아내는 재주와 담아낼 수 있는 기회는 아무나 타고나는 것도 아니고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도 아니니까.
시간은 화살일까 쳇바퀴일까
고무줄 얘기를 툭 하고 던졌으나 기실 괜히 던져본 단어인 것만은 아니었다. 이번 소설집의 대표작이랄 수도 있겠거니와 이미 이효석문학상을 수상하면서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던 「요요」. 이 단편 속 ‘요요’의 이미지가 어쩌면 그의 ‘고무줄’ 같은 재능을 닮아 있을지 모른다는 억측이든 추측이든 해보는 게 그리 엉뚱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요요. 한때 시인 정끝별은 같은 제목의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었다. “당신이 나를 지루해할까봐/ 내가 먼저 멀리 당신을 던져봅니다/ 달아날 수 있도록 풀어줌으로써/ 나는 당신을 포기합니다/ 포기는 복수/ 포기는 쾌락/ 그리고 포기의 보상// 당신은 늘 첫 떨림으로 달려옵니다// 던졌다 당기고/ 풀렸다 되감기고/ 사라졌다 되돌아오는// 천 갈래 던져진 그물 길/ 오요, 오요, 오 요요”라고. 시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요요’는 무엇보다 시간을 재는, 그 시간을 가늠케 하는, 그 시간의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껴안으면서 떠안고 있는 무시무시한 도구가 아닌가.
그렇다. 이번 소설집을 관통하는 키워드 하나를 붙잡고 보니 ‘시간’이란 얼굴이다. ‘시간’이란 얼마나 큰가. ‘시간’이란 얼마나 어려운가. ‘시간’이란 그래서 얼마나 당혹스러운 주제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시간’ 속을 살고 있는 걸까. 시계 속 시침과 분침을 바라보자면 “우리는 시간은 반복되는 것이며 회전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시간은 흘러갈 뿐이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게 외려 진실에 가깝다. 그러나 시간의 성질을 직선의 화살이나 순환하는 쳇바퀴 어느 하나로 파악하고 정의 내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요요」의 주인공 차선재의 스무 살 시절 첫사랑(장수영)은 편지에 이런 구절을 남겨놓고 돌연 자취를 감춘다. “시침과 분침이 겹쳤다가 떨어지는 순간, 그건 멀어지는 걸까, 아니면 다시 가까워지는 중인 걸까.” 이후 독립시계제작자로 살아간 차선재에게 시간이란 돌이킬 수 없는 무언가의 상징으로 자리잡았고, 장수영이 남긴 질문은 그의 삶을 지배하는 화두가 되었다. 차선재가 쉰다섯 살 되던 해 시계작품 전시를 열었을 때, 장수영은 아무런 예고 없이 그를 찾아온다. 마찬가지로 이제는 쉰다섯이 된 스무 살 시절 첫사랑이 마치 어제 만났다 헤어진 사람처럼 35년 만에 차선재를 만나러 온 것이다. 장수영의 귀환은 장수영이 차선재에게 던졌던 질문의 귀환이기도 했다. 이윽고 차선재는 35년 묵은 그 질문 앞에서 무릎을 탁 친다. 이제는 그 질문에 “요요의 시간”이라고 응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가까워지고 다시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지는 시간. 영원을 향해 직선으로 흐르지만 결국 다시 돌아오는, 요요의 시간.” 자신은 결코 지난 과거의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고 그 시간으로부터 자신은 멀어지고만 있다고 생각했던 차선재에게, 느닷없이 그때의 시간이 되돌아온 것이다, 꼭 요요처럼.
우물쭈물 사랑에 뛰어든 사내들의 총천연색 속사정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 그들로 꽉 차버린 지구라는 우리 공간. 그래서 데이터라는 통계가 필요하기도 하다지만 김중혁은 이 모든 인간의 잡스러움이 외로움에서 비롯된다고 믿는 듯하다. 알잖은가. 다들 외롭지 않은가. 그래서 서로의 위치를 쉴새없이 확인할 수 있는 갖가지 수단을 무던히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집안의 방마다 비밀이 있으며, 그 방에 살고 있는 수천 수백 명의 가슴속에서 고동치는 심장은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도 상상하지 못할 비밀을 품고 있다”고 찰스 디킨스는 그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에서 말했다.(「픽포켓」) 이 한 문장이 김중혁의 이번 소설집과 그 궤를 함께한다면 바로 이 단어, ‘비밀’이라는 말을 공유할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사람이라는 비밀, 사랑이라는 비밀, 그 무수한 비밀 속에서 우리는 삶이라는 단어를 구출을 해야 할까, 삶이라는 단어로부터 탈출을 해야 할까. ‘폭죽’이라는 두 글자를 따로 떼어 “폭과 죽, 뭐 이렇게 이상한 단어가 다 있어”(「종이 위의 욕조」)라며 작가가 일상에 돋보기를 씌워보는 까닭이다.
총 여덟 편의 소설이 실린 이번 작품집에서 그는 그만의 장기인 빠른 읽힘의 힘을 여지없이 발휘하고 있다. 일부러 쉬어가라는 듯 찍어둔 쉼표 사이사이 그만의 군더더기 없는 문장들은 여전히 젊다. 특유의 재치도 양껏 잘 녹여냈다. 그러나 뭐랄까, 앞선 소설들과 다르다면 다를 묘한 지점 하나가 또 눈에 들어온다. 멀겋고 말갛고 깊고 푸른 ‘슬픔’의 물구덩이들이 소설 여기저기에 무심히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기 물구덩이가 보인다. 김중혁이 놓았으니 물구덩이는 아닐 거야, 징검다리겠지, 하고 씩씩하게 밟았는데 힘껏 밟은 그 발끝에서 일대 파란이 인다. 물구덩이에서 튀는 물이 얼굴과 옷만 적시는 게 아니라 마음에도 그 척척함을 남긴다. 실로 어쩔 수 없는 인간사라는 관계의 헛함이 알알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또 남과 여라는 관계에 있어 왠지 쿨할 것만 같은 작가 김중혁에게도 ‘사랑’이란 매번 ‘첫사랑’이겠구나 싶은 구절은 묘하게 또 반갑게 읽히기도 한다. 이제야 왜 김중혁이 이번 소설집을 일컬어 ‘첫 연애소설집’이라 칭했는지 어렴풋이나마 알 듯하다. 그가 굳이 숨기려고 애쓴 적도 없지만 또한 애써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던 남녀 사이의 내밀한 틈 같은 것, 이를테면 그 관계의 자잘한 균열에서 지진까지의 진폭 같은 것, 그 사랑이라는 관계의 문제를 시간의 문제와 더불어 전면에 드러내는 시도를 해봤다는 게 그의 의도이지 않았을까.
“옆에 같이 있어줄 수 있어요?” “그럼요. 그게 제가 할 일입니다”(「상황과 비율」)라고 말하는 사랑. “아무런 애정 없이 그냥 한번 안아주기만 해도, 그냥 체온만 나눠줘도 그게 한 사람을 살릴 수 있대”(「가짜 팔로 하는 포옹」)라고 말하는 사랑. “생각은 가슴에 기름을 들이부었고, 가슴은 이제 머리까지 장악했다.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고, 손끝이 저릿하게 아려왔다. (……) 애초에 자신의 소유가 아니었지만 빼앗겼다는 상실감이 가장 컸다”(「뱀들이 있어」)라고 말하는 사랑. “두 사람의 키가 비슷해서 손을 잡고 걷는 게 불편하지 않았다. 차선재는 이렇게 손을 잡은 채 평생 걸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요요」)라고 말하는 사랑. 그래 이런 사랑. 이 사랑 다음에 무엇이 올까. 사랑 그다음에 김중혁이 꺼낼 패는 또 무엇일까. 신작 소설집을 꺼내들면서 다음 신작에 대한 기대를 앞서 덧대는 게 욕심임을 알면서도 못 참고 그 호기심을 던져보는 건 지금 이 시간에도 김중혁은 예서 쉬었다 가지 않고 또다른 새로움을 찾아 길 위에 서 있을 게 빤하기 때문이다. 그 바지런함 그 분주함, 보는 우리야 뭐 즐겁다지만!
김중혁 네번째 단편소설집, 첫번째 연애소설집
소설가 가운데 이이만큼 ‘잡(雜)’한 자 또 있을까. 좋은 걸 좋게 볼 줄 아는 타고난 심미안의 소유자니 그간의 삶이 꽤나 피곤했을 거라 짐작도 해보거니와 동시에 그가 전력에 도통 바닥이란 게 나지 않는 무한한 호기심의 별에서 왔을 거란 확신도 해본다. 그렇다고 뭐, 그가 ‘어른’ ‘왕자’란 얘기는 아니다. 어쩌면 “평범하고 작고 눈길 가지 않는” 이 시대 평범한 남자들의 대부가 또한 이이가 아닐까 해서다. 서두가 길었다. 우리 시대의 또 한 명의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인 김중혁 작가의 얘기다. 그리고 그의 신작 소설집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을 막 꺼내든 참이다. 숫자로 치자면 네번째 소설집이고, 그의 입을 빌리자면 첫번째 연애소설집이다. 대놓고 연애라니, 그렇다면 주요한 테마를 ‘사랑’으로 잡았다는 얘기인데 세상 그 어떤 소설이 사람에 대한 사랑이 아니고서 쓰일 수 있겠냐마는 그럼에도 ‘김중혁이 이야기하는 남과 여’는 보다 특별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왜? 서두에 밝혔듯이 그는 ‘잡(雜)’한 남자니까. 잡종은 원래 변종과 별종을 낳는 법이니까.
2000년 『문학과사회』로 데뷔했으니 올해로 등단 15년을 맞은 그다. 김중혁은 사계절마다 형형색색으로 피었다 지는 다양한 꽃 보기를 즐겨하는 수목원의 산책자를 닮았다. 그간 그가 펴낸 소설집 『펭귄뉴스』 『악기들의 도서관』 『일층, 지하 일층』, 장편소설 『좀비들』 『미스터 모노레일』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그리고 독특한 기획으로 펴낸 여러 산문집들과 동료와의 협업 글쓰기의 결과물들을 가만 보고 있자면 그 재주의 넓이와 깊이가 마구잡이로 늘었다가 줄어드는 흡사 검은 고무줄 같다 싶은 생각도 해보게 된다. 힘껏 당겨 한껏 늘이고 싶으면 그렇게 하고, 또 심드렁해져서 가만 내버려두고 싶으면 그렇게 해서 원래의 사이즈로 돌아오게 만드는 고무줄. 일례로 김중혁의 산문집 제목들을 한번 보자. 『뭐라도 되겠지―호기심과 편애로 만드는 특별한 세상』 『메이드 인 공장―소설가 김중혁의 입체적인 공장 산책기』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빨간책방에서 함께 읽고 나눈 이야기』 『대책 없이 해피엔딩―김연수 김중혁 대꾸 에세이』 그리고 『모든 게 노래』까지 그 제목들에서 느껴지는 자유분방함은 그를 그답게 보이는 데 제 역할을 다할 뿐 아니라 몹시 부러운 작가다 싶은 질투마저 유발하기에 충분하다. 왜? 제멋대로 보고, 제멋대로 쓰고, 제멋대로 그리고, 제멋대로 담아내는 재주와 담아낼 수 있는 기회는 아무나 타고나는 것도 아니고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도 아니니까.
시간은 화살일까 쳇바퀴일까
고무줄 얘기를 툭 하고 던졌으나 기실 괜히 던져본 단어인 것만은 아니었다. 이번 소설집의 대표작이랄 수도 있겠거니와 이미 이효석문학상을 수상하면서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던 「요요」. 이 단편 속 ‘요요’의 이미지가 어쩌면 그의 ‘고무줄’ 같은 재능을 닮아 있을지 모른다는 억측이든 추측이든 해보는 게 그리 엉뚱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요요. 한때 시인 정끝별은 같은 제목의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었다. “당신이 나를 지루해할까봐/ 내가 먼저 멀리 당신을 던져봅니다/ 달아날 수 있도록 풀어줌으로써/ 나는 당신을 포기합니다/ 포기는 복수/ 포기는 쾌락/ 그리고 포기의 보상// 당신은 늘 첫 떨림으로 달려옵니다// 던졌다 당기고/ 풀렸다 되감기고/ 사라졌다 되돌아오는// 천 갈래 던져진 그물 길/ 오요, 오요, 오 요요”라고. 시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요요’는 무엇보다 시간을 재는, 그 시간을 가늠케 하는, 그 시간의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껴안으면서 떠안고 있는 무시무시한 도구가 아닌가.
그렇다. 이번 소설집을 관통하는 키워드 하나를 붙잡고 보니 ‘시간’이란 얼굴이다. ‘시간’이란 얼마나 큰가. ‘시간’이란 얼마나 어려운가. ‘시간’이란 그래서 얼마나 당혹스러운 주제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시간’ 속을 살고 있는 걸까. 시계 속 시침과 분침을 바라보자면 “우리는 시간은 반복되는 것이며 회전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시간은 흘러갈 뿐이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게 외려 진실에 가깝다. 그러나 시간의 성질을 직선의 화살이나 순환하는 쳇바퀴 어느 하나로 파악하고 정의 내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요요」의 주인공 차선재의 스무 살 시절 첫사랑(장수영)은 편지에 이런 구절을 남겨놓고 돌연 자취를 감춘다. “시침과 분침이 겹쳤다가 떨어지는 순간, 그건 멀어지는 걸까, 아니면 다시 가까워지는 중인 걸까.” 이후 독립시계제작자로 살아간 차선재에게 시간이란 돌이킬 수 없는 무언가의 상징으로 자리잡았고, 장수영이 남긴 질문은 그의 삶을 지배하는 화두가 되었다. 차선재가 쉰다섯 살 되던 해 시계작품 전시를 열었을 때, 장수영은 아무런 예고 없이 그를 찾아온다. 마찬가지로 이제는 쉰다섯이 된 스무 살 시절 첫사랑이 마치 어제 만났다 헤어진 사람처럼 35년 만에 차선재를 만나러 온 것이다. 장수영의 귀환은 장수영이 차선재에게 던졌던 질문의 귀환이기도 했다. 이윽고 차선재는 35년 묵은 그 질문 앞에서 무릎을 탁 친다. 이제는 그 질문에 “요요의 시간”이라고 응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가까워지고 다시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지는 시간. 영원을 향해 직선으로 흐르지만 결국 다시 돌아오는, 요요의 시간.” 자신은 결코 지난 과거의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고 그 시간으로부터 자신은 멀어지고만 있다고 생각했던 차선재에게, 느닷없이 그때의 시간이 되돌아온 것이다, 꼭 요요처럼.
우물쭈물 사랑에 뛰어든 사내들의 총천연색 속사정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 그들로 꽉 차버린 지구라는 우리 공간. 그래서 데이터라는 통계가 필요하기도 하다지만 김중혁은 이 모든 인간의 잡스러움이 외로움에서 비롯된다고 믿는 듯하다. 알잖은가. 다들 외롭지 않은가. 그래서 서로의 위치를 쉴새없이 확인할 수 있는 갖가지 수단을 무던히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집안의 방마다 비밀이 있으며, 그 방에 살고 있는 수천 수백 명의 가슴속에서 고동치는 심장은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도 상상하지 못할 비밀을 품고 있다”고 찰스 디킨스는 그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에서 말했다.(「픽포켓」) 이 한 문장이 김중혁의 이번 소설집과 그 궤를 함께한다면 바로 이 단어, ‘비밀’이라는 말을 공유할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사람이라는 비밀, 사랑이라는 비밀, 그 무수한 비밀 속에서 우리는 삶이라는 단어를 구출을 해야 할까, 삶이라는 단어로부터 탈출을 해야 할까. ‘폭죽’이라는 두 글자를 따로 떼어 “폭과 죽, 뭐 이렇게 이상한 단어가 다 있어”(「종이 위의 욕조」)라며 작가가 일상에 돋보기를 씌워보는 까닭이다.
총 여덟 편의 소설이 실린 이번 작품집에서 그는 그만의 장기인 빠른 읽힘의 힘을 여지없이 발휘하고 있다. 일부러 쉬어가라는 듯 찍어둔 쉼표 사이사이 그만의 군더더기 없는 문장들은 여전히 젊다. 특유의 재치도 양껏 잘 녹여냈다. 그러나 뭐랄까, 앞선 소설들과 다르다면 다를 묘한 지점 하나가 또 눈에 들어온다. 멀겋고 말갛고 깊고 푸른 ‘슬픔’의 물구덩이들이 소설 여기저기에 무심히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기 물구덩이가 보인다. 김중혁이 놓았으니 물구덩이는 아닐 거야, 징검다리겠지, 하고 씩씩하게 밟았는데 힘껏 밟은 그 발끝에서 일대 파란이 인다. 물구덩이에서 튀는 물이 얼굴과 옷만 적시는 게 아니라 마음에도 그 척척함을 남긴다. 실로 어쩔 수 없는 인간사라는 관계의 헛함이 알알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또 남과 여라는 관계에 있어 왠지 쿨할 것만 같은 작가 김중혁에게도 ‘사랑’이란 매번 ‘첫사랑’이겠구나 싶은 구절은 묘하게 또 반갑게 읽히기도 한다. 이제야 왜 김중혁이 이번 소설집을 일컬어 ‘첫 연애소설집’이라 칭했는지 어렴풋이나마 알 듯하다. 그가 굳이 숨기려고 애쓴 적도 없지만 또한 애써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던 남녀 사이의 내밀한 틈 같은 것, 이를테면 그 관계의 자잘한 균열에서 지진까지의 진폭 같은 것, 그 사랑이라는 관계의 문제를 시간의 문제와 더불어 전면에 드러내는 시도를 해봤다는 게 그의 의도이지 않았을까.
“옆에 같이 있어줄 수 있어요?” “그럼요. 그게 제가 할 일입니다”(「상황과 비율」)라고 말하는 사랑. “아무런 애정 없이 그냥 한번 안아주기만 해도, 그냥 체온만 나눠줘도 그게 한 사람을 살릴 수 있대”(「가짜 팔로 하는 포옹」)라고 말하는 사랑. “생각은 가슴에 기름을 들이부었고, 가슴은 이제 머리까지 장악했다.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고, 손끝이 저릿하게 아려왔다. (……) 애초에 자신의 소유가 아니었지만 빼앗겼다는 상실감이 가장 컸다”(「뱀들이 있어」)라고 말하는 사랑. “두 사람의 키가 비슷해서 손을 잡고 걷는 게 불편하지 않았다. 차선재는 이렇게 손을 잡은 채 평생 걸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요요」)라고 말하는 사랑. 그래 이런 사랑. 이 사랑 다음에 무엇이 올까. 사랑 그다음에 김중혁이 꺼낼 패는 또 무엇일까. 신작 소설집을 꺼내들면서 다음 신작에 대한 기대를 앞서 덧대는 게 욕심임을 알면서도 못 참고 그 호기심을 던져보는 건 지금 이 시간에도 김중혁은 예서 쉬었다 가지 않고 또다른 새로움을 찾아 길 위에 서 있을 게 빤하기 때문이다. 그 바지런함 그 분주함, 보는 우리야 뭐 즐겁다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