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24일 금요일

가족이라는 병- 가장 가깝지만 가장 이해하기 힘든… 우리 시대의 가족을 다시 생각하다

가족이라는 병 - 10점
시모주 아키코 지음, 김난주 옮김/살림
‘가족이니까’라는 말로
우리는 서로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고받았는가…
출간 즉시 일본 아마존, 기노쿠니야 베스트셀러 1위!!

▶ 책 소개


출간되기 전부터 국내 주요신문에 소개되며 그 돌풍을 입증한 시모주 아키코(下重曉子)의 새 책 《가족이라는 병》이 드디어 한국에 출간됐다. 우리는 이 책이 왜 일본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베이비부머 세대가 고령화되고 새로운 형태의 가족들이 등장하면서 세대의 가치관이 충돌하고 있는 지금, 일본은 가족과 관련한 다양한 문제가 출현하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나라도 별반 다르지 않다.〈아빠를 부탁해〉〈슈퍼맨이 돌아왔다〉 등 단란한 가족의 일상을 보여주는 브라운관 밖은 심각하다. ‘모든 문제는 가정에서 비롯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작게는 가정불화로 인한 문제에서 돈에서 비롯되는 가정 해체 사건들, 심각하게는 가정 내 폭력과 살인 사건까지 보도된다. 특히 가족 동반 자살은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병리학적 현상이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이 책의 저자 시모주 아키코는 여러 계기로 인해 가족과 인연을 끊고 살다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마지막 남은 혈육, 오빠까지 죽고 나서야 자신이 가족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묻는다. “당신은 가족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까?”
사실 우리는 가족에 대해 모른다. 아니 알려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친한 친구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정도는 우정을 유지하기 위해 기억하면서 부모나 형제의 기호는 제대로 생각해본 적조차 없는 사람이 대다수일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를 한 몸처럼 생각하고 서로에게 이해를 바란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 상처들은 켜켜이 쌓여 어느 날 불화로, 사건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저자는 개인사뿐만 아니라 저명인사, 친구 등 우리 주위에 있을 법한, 또 실제 독자들이 겪고 있는 가족 내 문제점들을 사례로 들어 가족이라는 병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이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일단 ‘단란한 가족’이라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는 충고도 잊지 않는다.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로 가볍게 쓰여진 꼭지들은 ‘우리 가족만 이런 건 아니었어’라는 묘한 위로와 함께 앞으로 가족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새로운 시선을 갖게 해준다.


▶ 출판사 리뷰

우리는 어쩌면 실제로 존재할 수 없는
‘단란한 가족’이란 환상을 좇고 있는 게 아닐까? 

균형이 무너져 갈등에 빠진 가족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적으로든 서로의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힌다. 그리고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해결 방법을 얻기 위해 전문가들을 찾는다. 가족과 관련한 각종 심리서나 상담 프로그램에서는 문제가 발생한 이런 가족에게 다양한 해결 방법을 제시하곤 한다. ‘대화를 좀 더 많이 나눠보세요’ ‘함께 여행을 떠나 보세요’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을 만드세요’ 등 불화의 원인을 알아본 가족 상담 전문가들은 가족에 따라 처방전을 주듯 해결책을 준다. 그런데 이런 다양한 해결 방법 속에는 한 가지 전제가 있다. ‘이렇게 하면, 가족은 다시 단란해질 것입니다’라는. ‘단란한 가족’이 ‘정상적인 가족’이라는 개념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상적인 가족’이란 어떤 것일까? 부모와 형제가 다투는 일 없이 사이좋고 평화롭게 서로를 이해하며 사는 가족. 경제적으로도 웬만큼 풍족하고, 건강해서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모든 가족의 이상향과 같은 이런 가족이 과연 정상적인 가족일까? 이 책의 저자는 만약 그런 가족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면 오히려 섬뜩할 것 같다고 말한다. 정상적인 가족이라는 것은 사실 실제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기 때문이다. 

가족이란 함께 살고 있는 타인들일 뿐 

‘조용한 냄비도 뚜껑을 열어보면 끓고 있다’는 말이 있다. 겉으로는 화목해 보이는 가족도 한 꺼풀만 열어보면 곧바로 문제가 드러난다는 얘기다. 문제가 없는 가족도 병을 앓고 있지 않은 가족은 없다. 모두가 안 그런 척하고 있을 뿐이다. 남의 눈이 두려워 금슬 좋은 부부인 척하고 아이들 때문에 이혼할 수 없는 말로 자신의 인생뿐 아니라 아이의 인생도 불행하게 만들면서 말이다. 즉 ‘가족이라는 병’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은 흔하디흔한 병인 것이다. 
생각해보자. 우리는 가족을 선택하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첫울음을 울었을 때 이미 틀은 정해져 있다. 그 틀 안에서 가족을 연기한다. 아버지, 어머니, 자식이라는 역할을.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우리는 우연히 한 가족 안에서 살아가는 것일 뿐,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있는 타인들인 것이다. 그럼에도 가족들은 서로를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족이니까’라는 말로 서로에게 기대를 하고 그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상처를 받는다. 그렇게 받은 상처들이 퇴적되어 불화와 사건을 만드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시모주 아키코 또한 어린 시절 가족과 불화를 겪었다. 시대에 따라 자신의 신념을 헌신짝처럼 내던지는 아버지, 예민한 예술가적 기질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그 꿈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하는 나약한 아버지는 늘 실망스러웠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발을 절룩거리며 걷는 아버지를 발견할라 치면 다른 골목으로 돌아서 집으로 향할 만큼 아버지와 한자리에 있는 것조차 싫었다.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원망스러운 아버지 옆에서 그림자처럼 돕는 어머니. 자신의 인생도 없이 저자 자신에게 유형무형의 애정을 쏟아붓는 어머니는 부담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녀의 오빠는 아버지와 주먹다짐까지 벌일 만큼 사이가 좋지 못했던 탓에, 할아버지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어느 순간, 각자 사회생활로 흩어져 동네 이웃보다도 소원한 사이가 되어갔다. 세월은 너무도 금방 지나갔고 저자가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를 이해하기도 전에 차례로 가족들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때가 되어서야 저자는 묻는다. ‘나는 그들을 이해했을까. 도대체 나에게 가족이란 무엇일까.’ 
아이로니컬하게도 저자는 모든 가족이 죽고 나서야 그들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가족이란 무엇인지,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어졌다. 책은 저자의 개인사에 대한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는다. 아이 없는 부부, 늦은 나이에 이혼한 친구, 연로한 부모님을 돌보는 중년의 자식, 늙은 자식과 살아가는 부모, 혼인이 아닌 파트너를 선택한 사람들 등 다양한 문제를 겪고 있는 가족들과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의 이야기를 통해 가족이란 단란해야 한다는 환상을 독자들의 눈에서 걷어낸다. 또한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인의 인격을 되찾는 것, 그것이 진정 가족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름길이자 가족이 가족답게 살아가게 하는 길이라고 독자를 차근차근 설득한다. 저자의 글은 가볍게 흘러가지만, 책장을 넘기는 건 무겁기만 하다. 마치 내 가족을 말하는 듯한 사례에 공감하고, 문제를 절감하며, 앞으로 어떻게 가족을 대해야 할지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가족을 아는 것은 결국 나를 알기 위한 것 
물론 가족은 완전한 타인은 아니다. 가장 가까운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인만큼 반드시 서로의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 사고하는 방식부터 행동하는 순서까지 우리는 아버지 혹은 어머니의 행동을 그대로 답습한다. 특정한 날씨에 특정한 음식이 먹고 싶었는데 가족이 그것을 사온다든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다가 같은 부분에서 똑같은 말을 했다는 등의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어머니를 때리는 아버지를 평생 증오했음에도 자신 또한 부인에게 손찌검을 하는 소름끼치는 순간을 맞이하기도 한다. 닮는다는 말은 단순히 외모나 성격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가족의 삶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이정표가 되기도 한다. 
“아빠 같은 사람과 결혼하고 싶지 않아서 이 남자를 선택했어요.”
“엄마처럼 살기 싫어서 평생 일을 하면서 살 겁니다.”
흔히 들어온 이런 말들은 모두 가족이 알려준 삶의 행로였던 것이다. 

‘가족이라는 병’은 가족 각각이 서로를 이해하고 타인인 걸 인정하는 순간 치유된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여러 형태의 가족 문제를 꺼낸 저자는 다시 자신의 가족 이야기로 돌아온다. 태어나서 한 번도 가족에게 편지를 써본 적이 없는 저자는 가족들이 죽고 나서야 보낼 수 없는 편지 속에 솔직한 마음을 담는다.

‘결국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오빠를 알기 위해서 편지를 쓴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알고 싶어 쓴 것임을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이 이 세상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는 것도. 가족을 아는 것은 즉 자신을 아는 것이다.’

저자는 깨닫는다. 이렇게 편지를 씀으로써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처음, 제대로, 알게 되었노라고. 살아 있을 때는 단 한 번도 이해할 수 없었던 가족들, 그들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저자는 비로소 가족을 알게 되었노라고. 그러면서 평생을 마음속에 두고 말하지 않았던 가족에 대한 원망과 아쉬움, 바람과 후회가 저자를 지금의 모습으로 살게 한 삶의 이정표였다는 것도 말이다. 물론 텔레비전의 주말 드라마처럼 온갖 불화 속에서도 마지막에는 용서한다는 빤한 결말로 끝맺지는 않는다. 신념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던 아버지를 원망스러워한 만큼, 저자는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킨다. 단지 이제야 가족을 ‘알게 된 것’뿐. ‘용서한 것’은 아닌 것이다. 그녀의 마지막은 가족을 타인으로서 이해하는 순간, 가족은 닮는다는 통념도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